이정규의 작품은 제목이 말해주고 있듯이 잃어버린 세월에 대한 기억과 향수가 짙게 풍기는 회화 세계이다. 그리고 그것이 형태와 이미지의 자유로운 해석 내지는 결합, 그리고 역시 자유롭고 분방한 색채를 통해 매우 개성적인 회화 세계를 가꾸어 왔다.
이제까지의 이정규의 회화는 구상적인 세계에 머물러 왔다. 그러한 세계가 1년 전 경부터 서서히 보다 냉철한 현실 접근과 함께 의도적으로 서정성을 배제하고 있으며 특히 최근작에 와서는 그것에 대신하여 선명한 '대상 지시적' 대상 접근에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말해서 보다 직설적으로 대상을 묘출(描出) 해내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거니와, 그 대상이 또한 대개의 경우 우리의 지극히 일상적의 세계의 것이다.
직설적인 대상 묘출 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대상(주로 인물)을 단도직입적으로 간명하게 파악한다는 말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애매성도 수사(修辭)도 개입할 소지가 없다. 말하자면 화면에 등장하는 대상은 그 자체로서 화면을 지배하고 또 자신이 건네야 할 메시지를 완벽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인물)이 건네주는 메시지,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적 상황이다.
이정규가 그려내는 그 인간적 상황, 그것은 극적이거나 극한적인 것과는 인연이 먼 것이다. 오히려 인간의 삶의 현장이다. 그리고 그 현장을 마치 기록화를 그리듯 아무런 수식 없이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록화적이라고 하기는 했으되 여기에서는 정황 설정이 거의 배제되어 있다. 일상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결코 서술적이거나 순전히 재현적인 화법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설화적인 주제가 가능한 한 압축되어 있고 그리하여 생활의 한 정경 또는 현실의 한 단면이 하나의 독립된 삶의 현장의 축도 또는 독립된 현실의 초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다름이 아니라 이정규의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의 소산이 아닌가 생각된다.
현실 그리고 인간을 바라보는 이정규의 시각을 두고 일종의 '객체화(客體化)'된 시각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대상이 작가와의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듯이 보이며 인물은 인물대로 각기 주어진 조건아래서의 한 '전형(典型)'으로 환원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형화 된 인간상, 그 익명(匿名)의 인간상은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이의제기(異議提起)의 표상일 수도 있으려니와, 또 한편으로는 오늘날의 '인간풍속화'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과 현실에 대한 그와 같은 냉철한 객관화된 시각, 이정규는 그것을 역시 냉철한 방식으로 화면에 옮겨 놓고 있다. 다시 말해서 화사한 일체의 회화적 효과를 거부하고 모든 대상을 그 기본적 요소로 압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이 여류화가는 삶의 허실(虛實)의 베일을 벗겨버리려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1990. 12.
이일, 홍익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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